헬스트론 역사 Chpater 1
모친에 대한 생각, 그리고 결의
出發占
창업자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
두통과 불면으로 여위어 버린 모친을 위해서
「헬스트론」이 태어난 것은 지금부터 1928년, 하꾸주 창업자인 의학박사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에 의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세계최초 전위발생기의 개발이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전세계에 누계100만여대 이상이 보급된 헬스트론이지만 그 출발점은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소년시절, 어머니는 밤낮으로 고된일에 매달렸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심한 두통, 불면, 어깨결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 之) 박사에게 그것은 항상 불안의 요인이었습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모친
어머니의 신체를 의사가 고칠 수 없다면 스스로 치료해 보이겠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불안은 적중합니다. 어느 날, 그가 집에 돌아가자 모친은 몸져 누워 있었습니다. 잘 수도 먹을 수도 없고 극심한 두통까지 참아야 하는 모친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습니다. 의사로부터 「만성 증상에 효과가 있는 치료나 약은 현재 의학으로서는 어렵다」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끈질기게 요청하는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에게 의사는 「이학요법이라고 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치료에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는 「이학요법이 모친을 구하는 길이라면 망설일 것이 없다. 어머니의 신체를 의사가 고칠 수 없다면 자신이 치료해 보이겠다」라고 결심합니다.
헬스트론 역사 Chpater 2
연구와 기업. 그리고 의료분야의 공헌, 그리고 결의
転機
20만 볼트 X-ray
뢴트겐 연구에 몰두하는 날들이 계속됨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고자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는 나가사키(長崎) 의대에 진학하고 당시 개설 된지 얼마 안된 물리 치료를 확립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연구 테마는 “뢴트겐” 이었습니다. 물건 만들기에 능했던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는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고가의 엑스레이 관구의 제조에 성공합니다. 이 의료에 널리 도움이 되고자 大正 14년 (1925년)에 「제국 뢴트겐 주식회사」를 23세에 설립했습니다. 그 후 20만 볼트의 엑스레이 장비의 성공은 의료 용구의 고안·제조에 생애를 거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00만 볼트 헬스트론 완성,
제국뢴트겐주식회사를 설립
“생물의 생명과 전기”라는 제목의 운명적인 독일 기사에서 영감을 얻음
연구와 기업이라는 바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일 의학 잡지에 실려 있던 「생물의 생명과 전기」라는 제목의 기사에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고전압의 전계 환경에서 인간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는 이 문구를 읽은 즉시 “혹시!?” 라고 생각합니다. 전압만을 수 백배 높여 인체에 작용시킬 수 있다면 안전하고 획기적인 물리 치료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예감은 시대가 변하고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면서 드디어 확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는 연구에 한층 더 주력하려고 「원리 과학연구소」를 창설. 1928년, 마침내 「100만 볼트 헬스트론 1호기」를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헬스트론 역사 Chpater 3
공개실험,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
試錬
100만 볼트 공중방전
스위치를 켜자 동시에 굉음 소리와 섬광이 일어남
고전압을 인체에 부하하는 헬스트론은 “과연 안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전압 통전 시험을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여러 번 경험하고 그 안전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하라 토시유키 박사(原 敏之)는 헬스트론 1호기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100만 볼트 통전 공개 실험을 결심하게 됩니다.
1928년 후쿠오카(福岡) 종합병원의 개원 기념에 실시한 공개 실험에는 신문사와 대학 교수, 사장 등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가 전원을 켜자 “팟!”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통전자가 포기하여 실험은 좌절합니다. 그것은 헬스트론이 세상에 나올 기회를 잃을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구할 사람이 나타납니다. “내가 실험대에 올라가겠습니다”라는 목소리가 회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어머니였습니다.
1928년 「주부의 친구」
후쿠오카(福岡) 종합병원
일본의 에디슨으로「주부의 친구」에 소개
주위의 사람들은 실험을 필사적으로 중지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믿는다”라며 사람들을 지나 실험대로 올랐습니다.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가 1호기의 스위치를 켜자 방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괜찮습니까”라며 걱정하는 교수와 의사, 경찰서장까지도 중지하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말과 함께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의 실험장안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 모습은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도 기쁜 변화가 일어납니다. 실험 당일 밤, 어머니는 그때까지 계속된 불면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숙면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깔끔하게 가볍다”라며 일어났습니다. 고전압에 의한 전계 치료는 그날 이후로 계속되어 약 1개월에서 어깨 결림이 2개월이 지날 때에는 다른 만성 변비도 나았습니다.
이러한 경과는 잡지 「주부의 친구」에 소개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 키운 일본의 에디슨’으로 소개됩니다. 이리하여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가 발명한 이학치료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후쿠오카(福岡) 종합병원을 비롯해 헬스트론 통전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헬스트론 역사 Chpater 4
재도전,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啓蒙
1955년 백수회(白壽會)의원 설립
전쟁의 영향으로 헬스트론 연구를 중단
전쟁의 영향으로 헬스트론 연구를 중단
학회에 발표된 헬스트론이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 사업화는 끊어져 불우한 시대를 보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을 돕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아들인 하라 아키쿠니(原 昭邦)와 함께 하라 부자(原 父子)가 헬스트론의 사업화에 다시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하라 부자(原 父子)는 헬스트론 연구를 위해 상경. 1955년 도쿄 분쿄구(東京 文京區)에 (주)하꾸주생과학연구소 (白壽生科學硏究所)의 모체가 되는 「백수회(白壽會) 의원」과 「백수회(白壽會) 본부」를 설립합니다. 헬스트론이 사용하는 교류고압전계요법에 대해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 치료 효과를 쓴 전단지를 제작하여 나눠주는 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윽고 헬스트론에 의한 통전 치료에 다니는 사람이 증가했습니다.
의원에서는 식생활부터 가정내에 문제도 적절하게 조언하고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하는 건강관리를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식사·운동·정신의 안정」이 세가지 원칙을 지킨 후에 건강이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염원의 제조 승인. 후생노동성(厚生勞動省) 제조허가 승인
동시에 하라 부자(原 父子)는 제조 승인 신청준비를 시작합니다. 도쿄(東京)대학 농학부(農學部) 교수와 도쿄도립 (東京道立) 위생 연구소 임상시험 부장 등의 협력을 얻어 신청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후생노동성(厚生勞動省)에서는 한번도 없던 교류 전기를 사용한 치료기였기 때문에 서류 심사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지만, 질병을 치료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혈액 중의 칼슘 이온이라는 학설이나, 혈액을 산성으로 하는 마그네슘과 칼슘이온이 역상관이라는 학설을 헬스트론을 사용하여 실증(實證)하게 됩니다.
또한 거듭되는 동물 실험과 임상 실험에서 초고압전계가 유해성이 없는것 등을 입증하여 마침내 제조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헬스트론 역사 Chpater 5
인기 급상승, 그리고 세계로
發展
사토수상(佐藤首相)의 친필
협력자의 지원. 헬스트론 국경을 넘어
헬스트론의 승인과 그 효과, 그리고 「식사 · 운동 · 정신의 안정」 이 세 원칙 위에 건강이 성립된다고 말하는 하라 부자(原 父子)의 건강 철학에 의해 점차 많은 하꾸주(白壽)의 참여자가 늘어갔습니다. 일반 환자와 더불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수상(首相)을 비롯한 정치가와 기업총수 등이 통원·이용하여 헬스트론의 평판은 전국적으로 퍼져 갔습니다. 이윽고 헬스트론은 좋은 협력자의 지원을 받아 전국에 그리고 세계로 보급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꾸주(白壽) 건강클럽이 전국에 설립되어 보급의 거점이 된 것 외에 1968년에는 일본 선박진흥회 (船舶振興會) 일본의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회장의 협력도 있고, 인도 “아시아 한센병센터”에 헬스트론이 기증되어 글로벌 활동이 시작됩니다.
이어 필리핀 국립 요양소에도 기증 했습니다. 이멜다 대통령 부인, 가르시아 후생성 대신 등 많은 사람들이 증정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브라질, 페루 등 중남미, 아시아 각국에서의 도입이 확실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필리핀 국립요양소 기증식
TBS의 TV프로에 소개되어 단번에 유명해짐
세계에 헬스트론이 소개된 시기에 일본국내에서도 헬스트론은 매스컴에 화려하게 등장해 그 인기에 불이 붙었습니다. 계기가 된 것은 도쿄 도라노몬 선박진흥(東京虎ノ門船舶振興) 빌딩 10층 도라노몬(虎ノ門) 하꾸주( 白壽)진료소에 설치한 100만 볼트 장치의 공개 실험이었습니다.
때는 1966년 3월 TBS 텔레비전이 진료 사무소에 카메라를 가져와 약 20분 동안 초고압 전계의 인체부하 실험을 방영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10개 이상의 미디어가 전파나 활자를 통해 100만 볼트의 치료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이 방영된 이후 문의와 주문이 쇄도하였습니다.
하라 부자(原 父子)도 해외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헬스트론 보급을 위한 순례여행을 다녔습니다. 특히 북남미는 자주 방문하여 총 8개국 25개소에서 강연했습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은 삼위일체의 건강 철학에 매우 가까운 “스트레스 학설”을 주창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스 셀리에(Hans Selye) 박사를 만나 헬스트론에 대한 이해와 찬동을 얻는 등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헬스트론 역사 Chpater 6
전진 그리고 새로운 신뢰 확보
飛躍
1988년 후생대신표창
(厚生大臣表彰)
더 신뢰를 높여 보다 글로벌 활동으로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아시아와 남미를 중심으로 보급된 헬스트론이지만 최근 20여년 동안은 한국, 중국, 대만에 차례 차례로 현지 법인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의료용 헬스트론을 한국내 전국 병원 등에 설치했습니다.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라는 창업의 원점에 입각한 활동은 최근 점점 글로벌활동으로 나아갔습니다. 의료 기관과의 제휴를 강화하는 시도와 대학과의 공동 연구 체제의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환자가 방문하는 아이치현(愛知縣)의 이토(伊藤)정형·내과 클리닉과 도쿄(東京)의 타메이케 산노(溜池山王) 병원 등 임상 현장의 협력을 얻어 조사·분석 활동을 통해 헬스트론 요법의 새로운 진화를 추진하는 한편, 오비히로 축산(帶廣畜産) 대학의 전국 공동 이용 시설 「원충병(原蟲病) 연구센터」는 동물 실험과 세포 실험을 진행하여 전계의 작용이나 안전성을 분석·검증했습니다. 또한 방위의과(防衛醫科) 대학, 홋카이도(北 海道) 대학, 홋카이도(北海道) 공대, 토쿠시마(德島) 대학, 케이오기쥬쿠(慶應義塾) 대학, 한국 원광대학교 광주 한방병원과도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1995년 「남수포장(藍綬褒章)」
수상
헬스트론 프라자
공로를 인정 받아 상을 받음
지금까지 헬스트론의 발명자인 하라 토시유키(原 敏之) 박사가 미국 국제 학사 최고의 상 「국제 아카데미 상」, 「황수포장(黃綬褒章)」, 「훈오등쌍광욱일장(勳五等雙光旭日章)」을 수상했고 사장직을 물려받은 하라 아키쿠니(原 昭邦) 사장이 「남수포장(藍綬褒章)」, 「감수포장(紺綬褒章)」, 「통상산업대신 표창(通商産業大 臣表彰)」, 「후생대신표창(厚生大臣表彰)」, 「도쿄도 공로상(東京都功勞賞)」, 「과학기술장관표창(科學技術長官表彰)」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회사의 노력이 아닌 “건강하고 장수 할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창업이념으로 경영노력을 해온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하라 아키쿠니(原 昭邦) 사장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남수포장(藍綬褒章)은 건강치료 장비의 규격기준의 법 정비라고 하는 시대흐름을 이어 사단 법인 「일본 건강치료기기 공업회 “현 사단법인 일본 홈 헬스(Home Health) 기기협회”의 설립에 공헌하고 20년 이상 그 회장직을 맡은 그 업적에 대한 것입니다. 하꾸주 역사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온 삼위일체의 건강철학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노력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의 건강에 기여할 활동을 추진하겠습니다.